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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름』 '여름'이라는 말을 관념적으로 입안에서 굴려 본다. 정열의 계절. 온갖 즉흥성과 도전이 "여름이었다."라는 유명한 짧은 글귀 아래 합리화되고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바로 그 마법의 계절. 그 시기가 주는 주황빛에 가까운 노랑의 쨍한 시각적 이미지와, 별로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몸이 기억하는, 무더위 속 흘러내리는 나 자신, 그리고 그 감촉을 씻은 듯 잊게 만드는 한철 청량한 과일들, 이를테면 수박 한 통, 복숭아 한 접시, 샤인머스캣 등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신다.   이 책의 말을 빌리자면, 정확히 스무 살의 나는 여름과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입밖으로 꺼내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마음에 항상 솔직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사람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얼레벌레 사는 것 같으면서도.. 더보기
『아가미』 눈을 감고 강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의도치 않게라도, 조금은 사나운 눈매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크고 흰자가 많은 눈. 눈동자를 돌려 쳐다보는 순간 째릿- 하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오소소 들고 마는 무쌍의 두 눈. 소년 시절의 강하는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 학생들의 단정한, 펌이 살짝 자연스럽게 들어간 머리와는 대조되는, 귀밑으로 살짝 내려오는 더벅머리의 아이였을 것 같다. 가늘고 길어서 청순하다는 인상이 드는 긴 머리 말고, 삐쭉삐쭉 튀어나와 저러다 입까지 삐죽 튀어나와 있는 거 아니야 하는 그런 머리. 특유의 거친 입과 성질머리가 캐릭터에 잘 반영된 머리라 해야 할까. 하지만 눈썹이 항상 치솟아 있는 평상시와 달리, 아주 드물게, 눈썹이 평온하게 제자리에 스르르 수평으로 자리 잡고 누운 날, 그날의 .. 더보기
『급류』 "가족을 속이고 상처 입히는 게 사랑이라면 도담은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서 찌그러트리고 싶었다." 도담은 그랬단다. 놀랍지 않게 도담에게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과도한 동화일까.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생과, 부모님과, 친구들과- 행복하고 단란하게 하루하루를 일궈 나가고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물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 궁금하긴 하니까. 아마 '아아,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하고 세일러문처럼 동정하려나. 하지만, 나는 더이상의 급류는 내 인생에 원치 않는다. 스무 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고 애틋하게 보내는 한 번뿐인 꽃다운 해, 나는 충동 그 자체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끼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더보기
『요즘 사는 맛』 나를 보살피는 일, 나는 지금 마음 속으로 무엇을 가장 간절히 원하고 있나?   한 마디로, 나를 아는 일. 나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를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맡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것 마냥, 난 다 알아- 하는 투의 자만심을 툭툭 흘리며.   아니었다. 하하.. 나는 항상 디즈니 공주처럼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 왔다. Someday, little star⋯ 바로 의무가 일찍 끝나는 삶을 살겠다고.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종일 여기 갔다가, 이거 했다가, 이것까지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밤이 되어버리는, 내가 내 삶 속에 없는 나날들이 아니라, 아침에 무언가를 하고 나면, 아- 이제 다 했으니 오늘은 어딜 가서 무얼 하며 보내볼까, 기지개를 펴며 외칠 수 있는 삶. 그런데, 정작.. 더보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그것은 이 긴 장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핵심 소재다. 솔직히 말해, 현실만 있는 세계에서 비현실의 삶을 상상해 보는 것은 가끔씩 불편하게 억눌려 있는 상태에서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나는 정말 올바른 장소로 향하고 있을"지, "그저 엉뚱한 방향으로, 엉뚱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건 아닐"지 항상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불안이 스멀거리고 있다. 단지 평소엔 의식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하루들을 살아낼 수 있을 뿐. 소설이 말하는 대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바로 그 도시의 벽이 불확실한, 투명한 젤리같은 물질일 뿐이라고.. 더보기
『어떤 물질의 사랑』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적당히 외로움을 길 밖으로 내던지며 나아가야 한다. 외로움이 적재되면도로도 쉽게 무너지니까. 알겠니?    당신이 나아갔던 길 변두리엔 당신이 그렇게 퍼 나른 외로움이 길을 따라 차곡차곡 쌓여있을까요. 당신은 이 한 생 살면서 얼마나 자주 '외롭다,'고 생각했을까요. 누군가의 손을 꼬옥 잡고 같이 살아내는 삶의 형태가 아니라면, 삽을 들고 꿋꿋이 걸어가는 삶이 나에게 찾아와 자리잡겠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해요. 나는 굳세다, 나는 용감하다, 나는 멋지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는 연인 없이 살아내는 일. 모두가 찬양하는 제1가치를 N번째 후순위로 미뤄두는 나는 모르쇠 심보. 핑크빛 그라데이션 젤네일을 한 그녀의 손가락 사이 약지에.. 더보기
『여름의 마지막 숨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어떤 일이 하고 싶은 소망.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랑이든, 명예든, 돈이든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는 일.    작중 '재연'은 청춘들이 꾸는 꿈에 생각이 가 닿았더랜다. 청춘들의 꿈은, 기성세대의 꿈과 비교해 봤을 때, 더 독자적인 레벨의 '불확실함'과, 그렇기에 더 넓은 가능성의 영역에서의 '풍부함'이라는 성질이 있다. 미래는 모두 'unknown'이라는 개념 아래 똑같다. 무한과 무한은 같은 '∞'라는 기호 아래 동일시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남은 인생에 관한 것이고, 이미 살아온 인생에 관해선 차이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마치 한 겹의 줄을 차근차근 꼬아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엔 자유분방하게 펼쳐져 있는 여러 갈래의 실들이 점점 시간의 흐름에 .. 더보기
『이끼숲』 연작 소설 중 '바다눈'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소설이 있다. 참 이름도 이쁘지, 바다 눈이라니. 바다의 눈👀을 말하는 걸까? 아님 바다 위로 내린 눈🌨️을 말하는 걸 지도 몰라. 둘 중 아무 것이든 아름다울 테지.  음료의 푸른색을 가리키며.“이건 바다.”그리고 그 안에 떠다니는 흰 점을 가리키며.“이건 눈.”     하지만 그 바다눈이 동물의 사체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래서, 그래서 고래 울음 소리같이 깊고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던 은희는 죽은 고래 사체와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만 걸까. 그럼 은유가 너무 끔찍하게도 슬퍼지는데.    책에 나오는 지하 도시에 대한 수식어로, '닫힌 세계'라는 말이 참 많이 등장한다. 닫힌 만큼 온갖 물질중심적이고 더럽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도 없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