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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가족을 속이고 상처 입히는 게 사랑이라면 도담은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서 찌그러트리고 싶었다." 도담은 그랬단다. 놀랍지 않게 도담에게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과도한 동화일까.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생과, 부모님과, 친구들과- 행복하고 단란하게 하루하루를 일궈 나가고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물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 궁금하긴 하니까. 아마 '아아,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하고 세일러문처럼 동정하려나. 하지만, 나는 더이상의 급류는 내 인생에 원치 않는다. 스무 살,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고 애틋하게 보내는 한 번뿐인 꽃다운 해, 나는 충동 그 자체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끼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상처입혔다. 나의 자유의지 앞에 그딴 방해물은 중요치 않다는 듯이. 생각해 보면, 나는 자유로운 사랑을 원한다 호소했지만 실제로 추구한 건 내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얄팍한 결정권에 불과했다. 책임의 부재, 방종, 자기소모, 만용. 나는 두번 다시는 부모님의 그런 두 눈을 마주할 수 없다. 그렇게 집나간 미친년의 제정신을 머리채 잡고 집에 돌려보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가해지는, 합리화되는, 수많은 형태의 폭력을 생각한다.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절제 있게 행동하고 싶지만, 단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스터 키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지은 것 마냥, 원초적인 하루살이, 불나방의 형태로 달려드는 나 자신의 꼴이 우습다. 그래서 사랑이 싫다. 어쩌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선 나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기억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벗어날 수 없으면 어떡하지. 평생 나의 한 구석이 미우면 어떡하지. 확실히 나의 어떤 조각은 급류에 휩쓸린 것 마냥,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차단된 어떤 한 제약으로써 기능하는 ‘급류’를 생각한다.
 
  물에 빠지다. 진흙에 빠지다. 뻘에 빠지다. 맨홀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역시, 사랑은 빠지는 게 맞다. 불가항력적이고,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그래서 나는 도담의 마지막 장에서의 대사가 너무 존경스러웠다.

 

난 빠진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한 거야.

  
 

  나는 언젠가 저런 말을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을까. 충동이 아니고, 본능에 새겨진 욕구가 아니고, 설계된 운명의 꼭두각시 놀음도 아니고, 나의 자유의지로,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라고. 의심되지 않는 확실함을 원한다. 후회없을 선택을 갈망한다. 한껏 쪼그라들어, 되찾은 생활에 만족하면서도, 나를 미워하면서도, 나의 마음을 불신하면서도,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들을 좋아라 찾아 읽는다. 그렇게 오늘도 감정선들을 널뛰며 사람답게 살아간다.

 

 
급류
2020년 《한경신춘문예》에 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정대건의 두 번째 장편소설 『급류』가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40번으로 출간되었다. 『급류』는 저수지와 계곡이 유명한 지방도시 ‘진평’을 배경으로, 열일곱 살 동갑내기인 ‘도담’과 ‘해솔’의 만남과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아빠와 함께 수영을 하러 갔던 도담이 한눈에 인상적인 남자아이 ‘해솔’이 물에 빠질 뻔한 것을 구하러 뛰어들며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저자
정대건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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