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brary

『아무튼, 여름』

  '여름'이라는 말을 관념적으로 입안에서 굴려 본다. 정열의 계절. 온갖 즉흥성과 도전이 "여름이었다."라는 유명한 짧은 글귀 아래 합리화되고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바로 그 마법의 계절. 그 시기가 주는 주황빛에 가까운 노랑의 쨍한 시각적 이미지와, 별로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몸이 기억하는, 무더위 속 흘러내리는 나 자신, 그리고 그 감촉을 씻은 듯 잊게 만드는 한철 청량한 과일들, 이를테면 수박 한 통, 복숭아 한 접시, 샤인머스캣 등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신다.
 
  이 책의 말을 빌리자면, 정확히 스무 살의 나는 여름과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입밖으로 꺼내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마음에 항상 솔직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사람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얼레벌레 사는 것 같으면서도 친구들의 "고?" 한마디에 "고!"를 외치며 달려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봄날의 망아지🌸 한 마리였달까. 이 별명도 다그닥 하는 말괄량이 망아지를 나와 겹쳐 보던 내 친구의 말을 빌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스무 살을 그렇게 쯧쯧 하며 살갑지 않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뭐든 바라보기에 동전의 양면같이 다르게 보인다고, 내 스무 살이 이전에 쓴 글처럼 막무가내에, 중용을 지키지 못하고 충동에 허물어지는 습성을 가졌다면, 동시에 그건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쉽게 빠져드는 사람의 순수함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는 무조건 동전의 뒷면만 보고 살았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일 초도 망설임 없이 그 때보다는 더 현명하게 살 것이라고 외칠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잊고 싶은 흑역사들의 범벅인 여름을 온 생을 바쳐 짝사랑하며, 항상 순박한 기대를 반복해서 쌓아올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처음엔 신기했다. 정열의 결과를 쓰라리게 맛보고도, 계속 진심으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니. 계절이라는 개념의 특성상 매년 비슷하게 별다를 바 없이 끝나고 넘어가기를 반복하는, 어찌 보면 가장 쉽게 질리고 기대를 포기할 수 있는 단조로운 시간의 되풀이 속에서도, 역시 자신은 여름의 사람을 닮고 싶다고, 역시 여름이 되면 이러이러하게 행동하는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며, 한철을 소소하지만 해맑고 큰 웃음으로 살아낼 수 있는 능력. 책은 잔잔했지만, 다 읽고 나서는 부러움과 존경스러움이 동시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실패, 또는 실수라 여겨지는 무언가의 결과를 맞닥뜨렸을 때, "아, 다시는 이 길로 가지 말아야지."하고 뒤돌아서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랬나 보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한 실패라는, 하나의 정적인 단면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억을 뒤로 돌려 보면 기쁜 기억이 슬픈 기억으로 바뀌기도 하는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구슬마냥, 울고, 웃고, 쓰라리고, 하지만 짜릿하고, 모든 면을 통과해가던 일련의 시기, 내지 경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배움이라곤 일도 없는 사람인 듯, 실수를 되풀이해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좋은 것들은 쏙쏙 골라내, 다시 한번 농축된 열정을 체험해내 보아도 괜찮겠다, 라는 안심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에서부터 따뜻하게 차올랐다.
 
  여름, 또는 여름의 사람은, 좋은 것이다. 티없이 완벽하다곤 못하겠지만, 분명 어린 순수함과, 돌이켜 보았을 때의 풋풋함이 물씬 배어나오는 계절. 이제는 나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여름
아무튼 시리즈의 서른 번째 책.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등으로 많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김신회 작가의 신작으로, 1년 내내 여름만 기다리며 사는 그가 마치 여름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처럼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뜨겁게 써내려간 스물두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책 속에는 휴가, 여행, 수영, 낮술, 머슬 셔츠, 전 애인 등 여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로 그득하다. 여름이 왜 좋냐는 물음에
저자
김신회
출판
제철소
출판일
2020.05.29

'libr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 도쿄』  (0) 2024.10.0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6) 2024.09.20
『아가미』  (2) 2024.09.05
『급류』  (1) 2024.09.02
『요즘 사는 맛』  (0) 2024.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