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중 '바다눈'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소설이 있다. 참 이름도 이쁘지, 바다 눈이라니. 바다의 눈👀을 말하는 걸까? 아님 바다 위로 내린 눈🌨️을 말하는 걸 지도 몰라. 둘 중 아무 것이든 아름다울 테지.
음료의 푸른색을 가리키며.
“이건 바다.”
그리고 그 안에 떠다니는 흰 점을 가리키며.
“이건 눈.”
하지만 그 바다눈이 동물의 사체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래서, 그래서 고래 울음 소리같이 깊고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던 은희는 죽은 고래 사체와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만 걸까. 그럼 은유가 너무 끔찍하게도 슬퍼지는데.
책에 나오는 지하 도시에 대한 수식어로, '닫힌 세계'라는 말이 참 많이 등장한다. 닫힌 만큼 온갖 물질중심적이고 더럽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도 일어난다. '목소리를 다 녹음하고 난 뒤에 목소리를 판 인간이 더는 그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발성기관을 망가뜨린다'는 버튜버 사업도 일종의 그런 것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은희가 하룻밤만에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마르코의 눈앞에서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아무리 서로 다 못 사는 처지였다고 해도, 주변에 도움 한 번 요청할 수 없었을까? 특히나 마르코에게. 그렇게 예쁜 목소리로 입 한 번 뻥끗해보지 못하고 최후의 방법을 쓰고 무너져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거듭하면 은희의 존재감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고래였으나, 죽어 수천 수백 수억 개의 바다눈으로 흩어져 버린, 더이상 똘똘 뭉친 한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넓은 광경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닫힌 세계'에서 쫓겨나고 밟힌, '산송장'의 슬픈 막장.
그리고 '바다눈'에서 마르코가 은희를 잃게 된다면, 마지막 연작 소설 '이끼숲'에선 소마가 이미 잃어버린 유오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로 시작된다. 그 둘의 서사는, 그리고 소마의 시선에서 바라본 유오에 대한 묘사는, 나를 미치게 한다. 식물을 사랑하는 유오. 신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나를 기다리던 그가 알고 보니 들꽃이 잘 서도록 주변의 흙을 정리해주는 중이었다던가, 할머니에게 들은 지상 위 바오바브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심장을, 내리쳤을 터-라던가. 식물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는 모습, 또 그걸 포착해 간신히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는 소마. 그리고 흰 거품 사이로 보글보글, 좋아한다는 말을 건네는 고백 연습을 몇 번이고 하는, 한없이 여리고 수줍은 소년 한 명. 이 말은 세계 아래 빨간색 굵은 볼드체의 문장 하나로 와장창난다. '하지만 곧장 다시 울리는 전화를 보고 직감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처절해지겠구나.'
솔직히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 얘도, 쟤도. 그리고 마지막의 소마도. 물론 동화적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나는 소마가 돔 밖으로 나가 유오의 클론을 업고 결국 이끼 가득한 곳에서, 그들의 일부가 되어 스르르 사라지는 죽음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책에도 나왔다시피, 죽은 유오가 없이 소마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소마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오가 죽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다고 친구가 죽었다고 따라 죽는 무모한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유오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꼭 볼 거야. 가고 싶어! 그러니까 너희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무엇을 감히 하지 못할까. 친구가 별을 보고 싶다면 하늘을 뜯고 찢어 움켜쥐어 갖다 줄 아이들 여섯 명인데. 그런 이유로 유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실제 유오가 아닌 유오의 클론이라도 목숨을 걸고 훔쳐 지상으로 데려 가는 아이들이 어리석다거나, 막무가내라거나 하며 잔소리하진 못하겠다. 오히려 그렇게 바보같다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면, 그 아이들의 사랑에 순수하게 동화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질 것 같았다.
디스토피아지만, 그 속 아이들이 참 예뻤다. 언젠가는 사라질 인생이었지만, 하필이면 그 인생이 인류 최-저점의 시대에 태어나 톱니바퀴 굴러가듯 일하는 것만이 인간의 가치였던 개미지옥에서, 비극적으로 튕겨져 나가고 마는 삶들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오히려 그들의 짧은 삶이 더 굵게 다가왔다. 막연하게 '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다는 작가님. 그들은 무엇을 구할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무엇을 구했을까?
- 저자
- 천선란
- 출판
- 자이언트북스
- 출판일
- 2023.05.02
'libr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물질의 사랑』 (0) | 2024.07.27 |
---|---|
『여름의 마지막 숨결』 (0) | 2024.06.23 |
『지구 끝의 온실』 (0) | 2024.05.22 |
『레버리지』 (0) | 2024.05.07 |
『몰입의 즐거움』 (0) | 2024.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