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이 난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무해하게 난폭했다. 단어와 단어들이 삐그덕거리며 어찌어찌 연결되어 한 문장의 구조를 형성하긴 하는데,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하면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지금 침대에 포근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인지 온몸이 질퍽질퍽 빠지는 진흙탕, 흡사 뻘과 같은 공간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인정할 수 없었다! 눈앞의 나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독서를 하고 있는데, 분명히 '문자'를 읽어나감에 따라, 그 흐름이나 의미가 머릿속에 상이 맺히듯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게 정상일지언데, 도저히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글이 있다니. 😞 마치 내가 맹문, 난시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의 독해력이 딸리는 것인가? 파들파들, 하고 긁혔다. 긁혀버렸다. 그래서 최대한 문장 하나하나마다 멈춰 가며, '그' 내지 '그녀'라는 캐릭터가 처해 있는 상황, 위치해 있는 공간적 배경 등을 상상해가며 그들을 인형극마냥 움직여 보고자 했다. 양선형의 문체는 첨예하고 독립적인 명사와 수사들로 가득해서, 이를 바탕으로 머릿속에 무언가의 영상을 재생하는 일은 참말로 재미있어 왔으니까. 예를 들어, 작가의 다른 소설집인 『클로이의 무지개』에 나오는 문장들 중 내 마음에 쏙 들어 따로 기록까지 해뒀던 문장들을 몇 가져와 보겠다.
피자를 야식으로 주문한 다음 냉장고에서 내 입맞춤을 기다리는 시원한 맥주와 함께 신나는 새벽의 카니발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가면의 공방, 사형장의 이슬
어린 시절의 황당무계한 허구 속에서 우정과 갈등, 비애와 죽음, 재생과 환희를 되풀이하며 무대 위를 종횡무진 활동하던 배역들이었음에도 그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야기가 삭제되어 있었다.
-클로이의 무지개, 출항: 마술 키트
야식으로 피자와 맥주를 때려야 겠다는 말을 저렇게 장엄한 연설투로 진지하게 외치고 있는 작가가 있다니. 그다음 문장은 더 귀엽다. 영화 『토이스토리』가 연상되는 대목인데, 누구나 자신의 아동용 완구들을 어릴 때 도대체 어떤 이야기 아래 그렇게 신나게 갖고 놀았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그 인형들을 또 이렇게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선을 연주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들에게 깃들 이야기, 배정받을 배역이 삭제되어 버린 비련의 배우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그의 문체에 첫눈에 반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러니 내가 양선형의 소설을 안 좋아할 수가 있나!
아래는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한 그의 문장이다.
이제 제게 그런 품위를 간직할 힘이 생겼다는 뜻이에요. 내일은 또 모르겠지만, 문득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져서 저는 정말 제가 되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있겠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으로요.
-클로이의 무지개, 만남: 거인의 의안
참으로 아름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고백하자면 위 문장의 앞뒤 맥락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 꿈결같은 소년의 목소리에 홀려서 다 까먹었나 보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소중한 코어 기억(core memory)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내가 정말 되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있는 나.
그러니까, 나는 본디 양선형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빨간색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난 문장 하나마다, 단어 하나마다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아아주, 더디고, 더딘, 속도로, 이 책을 독파해야 했다. 외로운 여정이었다.
그래서 무엇이 그렇게 어려웠나
다음은 『감상 소설』에 실린 열 편의 단편 소설들 중 하나, 「수은의 시도」에 나오는 대목이다. 같이 한번 감상해 보자.
(p.152) 그는 눈밭으로 간다 새로운 광물을 수집하기 위해서다 스무 개가량의 눈덩이를 뭉친 그는 이내 눈밭에 앉아 자신이 만든 눈덩이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눈덩이를 향해 허리를 기울인 그의 모습이란 마치 지금 막 먹이를 섭취하려는 쥐의 포즈와 닮아 있다 그는 눈덩이를 깨문다 그는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 지구다 눈덩이 내부에서 피가 번지는데 이내 그의 입가가 흥건하게 젖고 있다 핏방울이 눈발 위로 뚝뚝 떨어진다 지구는 비릿하게 떨고 있다 그는 자신의 축일을 기념하고 싶다 지구는 원을 그리며 뛴다 그는 포켓에서 주머니칼 한 자루를 꺼내든다 그리고 생물의 가죽을 벗겨내보려는 것처럼 눈덩이 표면을 얇게 발라내기 시작한다 배부른 토끼의 보를 그대로 적출하듯 말이다 그는 생각하듯이 말하고 말하듯이 본다 입을 벌린 공중 지퍼에서 생물의 내장이 끓어오르고 그것은 마치 체외를 향해 익사하는 민물 장어를 연상시킨다 그는 생물을 끄집어 그것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있다." 산산이 해체된 눈덩이들, 배를 까뒤집은 눈덩이들이 눈밭 여기저기에 홀홀히 나자빠져 있다
점 기호(.)가 없는 것은 내가 일부러 뺀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당 텍스트가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클로이의 무지개』를 읽던 때처럼 무언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내며 소설을 같이 산책하듯 즐기고 싶었단 말이다.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어도 된다. 희망적이 아니어도 된다. 뭐든 상관없으니 그 어떤 메시지(Message)를 전달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최대한 노력한 결과가 아래다. 그림과 같이 내 머릿속 흐름을 다시 재현해 보겠다. 하나하나 따라가 보자.
그는 눈밭으로 간다 새로운 광물을 수집하기 위해서다광물을 수집하기 위한 '곡갱이'를 들고, 눈밭을 걸어가는 점퍼 입은 한 남자가 그려진다.
스무 개가량의 눈덩이를 뭉친 그는 이내 눈밭에 앉아 자신이 만든 눈덩이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들고간 곡갱이로 뭉쳤을 리는 없고, 그럼 왜 들고 간 거지?
눈덩이를 향해 허리를 기울인 그의 모습이란 마치 지금 막 먹이를 섭취하려는 쥐의 포즈와 닮아 있다 갑자기 자신이 만든 눈덩이들이 식용(?)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눈덩이를 깨문다 그는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 지구다 눈덩이 내부에서 피가 번지는데 이내 그의 입가가 흥건하게 젖고 있다 핏방울이 눈발 위로 뚝뚝 떨어진다 지구는 비릿하게 떨고 있다 갑자기 '그'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눈덩이는 눈덩이에서 지구에서 생물로까지 한순간에 변모했다.
그는 자신의 축일을 기념하고 싶다 지구는 원을 그리며 뛴다 그는 포켓에서 주머니칼 한 자루를 꺼내든다 광물은 하나도 안 캔 것 같은데 결국 곡괭이는 등장과 동시에 쓸모를 잃고 버려진 게 분명하다. 일단 주머니칼을 꺼낸다. 뭐 하려고? 그리고 지구는 피를 줄줄 흘릴 땐 언제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듯 깡총깡총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는 포켓에서 주머니칼 한 자루를 꺼내든다 그리고 생물의 가죽을 벗겨내보려는 것처럼 눈덩이 표면을 얇게 발라내기 시작한다 배부른 토끼의 보를 그대로 적출하듯 말이다
이건 차마 그림으로 못 그리겠다.. 일단 눈덩이이자 지구이자 토끼였던 것은살육되고 만 모양이다.
그는 생각하듯이 말하고 말하듯이 본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본다'라고 했는데 그는 생각하지 않고 따라서 말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일단 여기 '존재'하긴 한다는데⋯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온 소설이 이런 느낌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위의 처참한 지구 눈 토끼 살해 사건이 아무! 맥락 없이 벌어졌단 것이다. 왜? 저자는 무슨 의도로 여기다 이런 장면을 삽입한 거지? 죽어도 모르겠다. 답답하다.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것은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책을 왜 읽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지? 일단 시작한 책은 끝내고 싶은 완벽주의적 오기가 있어서?
확실한 건 일단 이 책을 덮은 순간, 종잡을 수 없고 걷잡을 수도 없는 일련의 행동들과 묘사들과 사건들과 진실과 거짓같은 그 모든 것들이 압도적인 양으로만 내 머릿속에 찐득히 들러붙어 있었단 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해설을 펼쳤다. 그런데 해설까지도 어려웠다. 이런.
해설, 그리고 나의 해석
이게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결국 나는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를 스스로 발굴해 낼 의무가 있다. 마치 곡괭이를 들고 두리번거리듯. 문학평론가 강동호 님은 해설을 통해 이것 하나를 강력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불능의 문학
양선형의 문학은 '불능'의 문학이란다. 왜인고 하니 존재가 무가치해지고 무기력해지고 무능해지길 넘어 재생이나 회복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는 최악 최저의 지점, '불능'에 떨어지며 '비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그녀'로 수십 번 수백 번이고 호출되는 인물이 정말 인격체는 맞는 것인지 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들이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에 이유를 대고 뒷받침 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괴로웠고, 그래서 진흙탕 싸움을 하듯 어기적어기적 겨우 책의 끝무렵까지 도달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 이게 원래 그런 거란다.
그럼, 왜 '불능'인가?
왜 불구, 장애, 불가능, 망각, 제명됨, 박약함, 무력함의 온갖 수식어를 동반하고, 있는 힘껏 납작해질 수밖에 없는가? 왜 양선형은 이런 소설을 추구하는가?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평론가의 해설 내지 이론 설명은 개인적으로 소설만큼이나 또 어려웠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까지 난관이라니. 그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하고 싶었다. 내 목구멍으로 삼켜 넣어 꾸역꾸역 소화시킨 다음 나의 말로 그를 설명하고 싶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존경해 온 옛 물리 선생님이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진실로 무언가를 이해한 사람은 그것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하고 이해하기 쉬운 풀이를 제시해 볼란다.
변증법
이라는 게 있다. 여기서 나오는 '정반합'이라는 개념은 쉽게 말해서 A인 것과 ~A인 것이 대립하고 충돌함에 따라 A'이라는 한층 더 확장되고 발전된 개념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무엇인가?' 이는 '그렇다면 소설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라는 '반문'을 통해 우리의 생각의 차원을 더 깊게, 더 본질적인 방향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소설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은 예술과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기본적으로는 그 어떤 텍스트도 소설이라 불릴 수 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1917년 발표한 변기통으로 만든 작품 《샘》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지만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소설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주의를 부서버리듯이 이 『감상 소설』이라는 작품이 들어선다. 소설을 읽는다 함은, 결국 독자들이 시간을 소모하여 무언가 의미있는 내용이나 교훈, 하다못해 인상이라도 얻어가는 것이 소설일진대, 이렇게 무작위로 텍스트를 배열하기만 한 듯 실험적이고 난해한 문장들의 총체를 읽음으로써 결국 네가 얻는 것은 소모, 소모, 소모뿐이라면 어쩔 테지? 이것도 소설이라고, 문학이라고 부를 건가?
약간 도전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하지만, well, I'd say it was worth it.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양선형의 소설은 마치, '던전(dungeon)'과 같았달까. 적절한 비유일진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 보라. 예를 들어 지하 5층까지로 이루어져 있는 던전이 있다고 해보자. 많은 용사(작가)들이 그곳을 탐험하며, 던전의 비밀을 밝혀내고,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탐험(글쓰기)을 진행할 것이다. 그렇게 던전(소설 내지 문학의 개념)은 정체가 파헤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때 누군가가 최하층인 지하 5층 그 아래를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파보기로 한다. 광란의 굴파기를 시행하는 것이다. 두더지도 아니고. 이 무모하고 시대착오적인 용사(작가)는 끝나지 않는 '어스름' 속을 길 잃은 것처럼 헤매는 수밖에 없다. 계속, 계속. 그렇게 개미굴을 파내려가다가 돌연 그 아래의 땅이 꺼져버려서, 지하 6층이라 부를 만한 장소(소설의 새로운 지평선)가 나타난다. '나타났다'기보단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양선형의 '글쓰기-기계에 대해 실험됨'의 정체가 아닐까. 양선형은 작중 군데군데에서 '용기'라는 단어를 썼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봤는데, 이렇게 자신이 확신을 가질 수도 없고, 세간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지만, 파다 보면 자신에게 답을 줄 것만 같은 그 불확실한 연기같은 무언가를 손에 애써 쥐기 위해 소설이라는 기계에 갇혀 땅굴을 파고, 파고, 또 파는 일련의 의식 같은 글쓰기. 그게 양선형의 글쓰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