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계절의 문턱을 넘어오지 못했다. 문턱보다 낮은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쏘아 죽인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턱보다 높았던 것은 그렇게 문턱보다 낮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그 시절에서 데려오지 못해 평생을 쓰라려야 하는 나머지 영혼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조그만 라디오를 선물받아서, 그걸 받아들고 곧장 '1980.5.18'이라고 입력했더랬다.(p.204) 하지만 시간만 이동할 뿐 공간은 이동하지 않았던 결과 작가는 평범하게 춥고 무탈하게 조용한 서울의 겨울 어느 곳에 안착했다. 고요함이 무서웠다. 그 일을 쓰려면 그 곳에 있어봐야 한다. 그 사명감은 위대했다. 하지만 만약 그 라디오가 1회용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 부끄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해 사지로 나를 내던질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내게도 일어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무논리 무생명 무자비의 곳으로? 아니면, 나는 이런 선택의 책임으로 고민해야 하는 버거움에 몸서리칠까?
역시, ‘영혼’이란 건 정말 어렵다. 작중 김진수는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p.130) 우리는 여기서 영혼의 딜레마 앞에 놓인다. 군인들의 총구 앞에 뭉친 수십만 명의 군중과 다함께 고취되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거대하고 순수한 심장에 연결되어 내 안에서 고동치는 양심의 앞에 떳떳하게 설 순 있다. 하지만 그 영혼의 증명으로써 영혼이 깨지고 만다면? 나같은 사람들은 영혼이 깨질 만한 사건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감히 상상해볼 수도 없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 안의 떳떳한 무언가 사이에 고르라고 저울질을 강요받은 적이 없다. 비인간적인 참상을 목도하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이며, 우리는 한낱 보편적 경험을 한 것 뿐인가'(p.134)라는 인식에 절망해야 했던 적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감’과 ‘연대’뿐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나야 했던 일들과 스러져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 그 거대한 총체를 꾸역꾸역 한입에 밀어넣으려 안간힘을 썼다. 최대한 많은 문장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게 다였다.
나는 정확히 여기서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질적으로 할 수 없음에. 인간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온갖 발버둥은 그들의 몫이었고, 나에게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니, 하고 후세인으로서 눈물을 몇 방울 흘리는 것이 끝이었다는 사실이. 이런 책을 읽었음에도 정작 미래에 만에 하나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과연 떳떳한 지식인으로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묵음하고 마는 나 자신이. 선주는 '긴급조치 9호의 의미를 이해했고, 대학 정문에서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를 이해’했다.(p.157) 자신에게 퍼부어진 폭력의 크기에 압도되어 발을 절게 되었다. 그게 비난받을 일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자신에 계속 괴로워해야만 했다. 연신 깨진 유리조각들이 널린 깜깜한 잔디를 걷는(p.168) 기분이어야 했다. 은숙은 단지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도 다시 도청으로 돌아가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본 그 날, 중학생인 동호가 총을 들고 남아 있는 모습을 본 그 순간, 영혼이 부서지고 말았다.(p.89)
이러한 역사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영혼은 그 존재를 증명하도록 몰아붙여져서는 안 된다. 말만 늘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한강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나도 유의미한 한 점으로 무언가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설령 어마어마하게 드문 나비효과라 하더라도.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내 안에서 확실해진 결심이 있다면, 나는 비록 추상적일지언정,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타인의 엎어짐 위를 밟고 올라 그 취함을 기뻐하고 싶지 않다. 내가 건져 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며 살아가고 싶다. 내가 바쁜 20대의 직장인으로 출근을 하고 있을 때에도, 80대의 할머니가 되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에도. 그게 문턱을 넘은 자들의 후손으로서 그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플러스의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 저자
- 한강
- 출판
- 창비
- 출판일
- 201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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