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훨 날아가렴 지희야"
네 그래서 지희는 날아갔답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인연을 쿨하게 놓아버렸어요. 물론 제 기준에서 쿨한 거지 상대방 입장에선 정말 이기적인 결정이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날아간 지희는 자신의 삶을 살았어요. 좋아하던 아침 수영도 마음껏 하고, 운전 면허도 결국 여름방학 안에 따냈죠. 2학기 초반까지 이어진 회계 공부도 결국 전산회계 2급 자격증을 손 안에 넣으며 잠시 쉼표를 찍었어요. 하지만 지희는 새로움의 연속이라며, 개발 인턴 일을 시작했죠. 들어온 기회를 걷어차지 않는다는 주의라. 물론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지희가 과외도 주 6회를 뛰고 있고, 알바에도 주 20시간 정도를 할애하고 있으며, 학기를 다니고 있는, 어디까지나 학생의 신분이라는 점이 문제였죠.
그녀는 자신을 위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대단한 사람으로 인식했어요. 주위에 그녀만큼 바쁘게 사는 사람은 없어 보였거든요. 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오만한 생각임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전형적인 우화적 레파토리의 전개는 여러분들도 이미 익숙하시겠죠.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는 글자를 할애하지 않을래요. 조금 더 결과와 직결된, 그리고 조금 더 본질적인 쪽에 초점을 맞춰 보죠. 그녀는 왜 믿음과 신뢰와 의지라는 중요한 인생의 가치들을 저버리고 조교단을 등지었나요.
폭탄을 있는 힘껏 던지고 터뜨린 후의 지희는, 고요해진 주변에 뭘 해야할 지 몰라서, 또 이 고요가 너무 막막해서, 일단은 침대에 조금 누워 있기로 했어요. 이 시기은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기억될 순간일 거에요. 저라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라 어떤 가치를 저버렸는지가 이토록 선명했던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인생은 가치를 따지고 갱신해나가는 것의 연속이라 했나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진실된 것은 무엇일까요. 명예? 사람? 우리가 죽어서 잃는 육체나 정신? 예술과 과학 1강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시간이라고. 인간은 시간성의 존재라고, 단 하나 우리와 함께 태어나고 우리와 함께 죽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그것을 채워나갈지 인생을 통틀어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시간일 거라고.
그 강의의 막바지에서 지희는 비로소 그 왜-라는 질문의 실마리를 살짝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아직 멍하기만 하고, 뒷처리도 완벽하게 한 상태가 아니라 이 선택이 불러올 후폭풍이 어떤 형태로 나를 덮칠지 모르는 미지의 두려움 속에서 지금은 침대에 웅크려 있을지언정, 제가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절박했던 정신 상태와 스스로 진단한 우울증적 상태의 근원이 되었던 단 한 가지 이유를 다시금 또렷이 상기해 낸 거죠. 저는 시간을 이곳에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슬프도록 간단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소중한 다른 가치는 많습니다. 나의 사람들, 나에게 신뢰를 준 자들, 나를 키워주신 은혜, 내가 있어야지 해소되는 불안이나 위험들. 하지만 반 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전부터 저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느꼈습니다. 더이상 이곳에 시간을 쏟는 것은, 그 모든 가치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무가치할 것 같다고.
아직 그것을 대체할 가치를 찾아내진 못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던 모든 도전, 프로젝트, 몰두, 잠식 이러한 워딩이 어울리는 위시리스트는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이제부터가 제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그 역사를 기록할 시간들이겠죠. "너는 A를 버리고 그 어떤 B를 선택했니?"에 대한 답을 내는 과정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인간이라는 궁극적 목적, 그리고 그 인간을 정의하는 시간이라는 존재, 이것을 어떻게 채워나가 너의 삶을 정의할 지는 너에게 달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말에, 한 발자국, 제 답을 제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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