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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I의 탐색일지

위 성인은 오늘부로 과외를 수료하고 졸업합니다. 나는 대치동에서 자랐다. 이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충분히 놀고 즐겨야 할 유년기를 빼앗겨버린 것 마냥 빡세게 자란 애처럼 대하는데, 막상 또 그렇지는 않다. 나도 초등학교 때 매일 하교 후 집 앞 운동장에서 모래와 뒹굴며 그네를 타고 술래잡기를 하고 폐가 팽창해 터질 때까지 뛰어다녔다. 영어학원에서 정말 좋아하는 쌤과 penpal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많은 반과 많은 친구들에게 정과 미련을 두고와서, 지금에 와선 그 모든 유년기의 기쁨 그 자체가 흐려짐과 동시에 더더욱 소중해진 것 같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내 학원비에 부모님이 많은 돈을 쏟아부으신 것은 사실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어쩌면 성인이 되었지만 대학생은 못되었더라면 더많이. 그래서였을까? 대.. 더보기
『빛이 이끄는 곳으로』 '아름답다', 라고 무심코 입 밖으로 말해버리고 만다. 어떤 류의 대상들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난 그 아름다운 것들의 공통점을 찾고 싶다. 아니, 찾아야만 한다. 내 온 인생을 걸고서라도. 아름다움이란, 따스한 것들인가?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건물 보수공사의 허가를 받는 데만 1년이나 걸리는 파리에서 살아가는 나를 상상해본다. 느리다, 하지만 느리기에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본질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온힘껏 껴안으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낭만주의자들의 말. 나는 과연 소위 '빨리빨리 한국인'의 긴박함에서 벗어나 그곳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그것은 내가 한국에서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되는 긴 시간을 몸담고 있었기 때문인가.. 더보기
『돌이킬 수 있는』 갑작스럽게 여자의 귀 안쪽을 때리는 진동이 일었다. 왼편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활엽수 때문에 건너편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멀리서 무거운 울림이 하나둘 착실히 건너오는 건 느낄 수 있었다.(p. 7) 이 책의 첫 페이지입니다. 가슴이 두고두고 벅차오르는 초능력 SF 순애 서사의 출발선이죠. 누구도 건드리려 하지 않는, 거대한 공동묘지 🪦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하나가 오늘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웹소설 제목도 아니고. 그런데 그 일이 정말 일어났다. 깔끔하게 절취선을 따라 잘린 듯 폭삭,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몇십 초 동안 그 위의 모든 게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다가듯 떨어졌다고. 물리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중력가속도를 9.8, 반올림해서 1.. 더보기
『채식주의자』 나는 이 소설에서 나만의 깊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작가들이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자신에게 되뇌는 것과 비슷한 자기세뇌다. 그리고 난 이런 자신감이 근거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간의 주목을 한눈에 받는다는 건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감상은 다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에. 당장 소설을 다 읽고 유튜브에만 가봐도 그렇다. 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폭력성'을 무려 4개의 층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전달한 한 인문학도도 있었고, 이 책이 등장한 선정적인 문구들을 큰 자막에 띄워가며 읊으신 후 이런 책이 노벨상을 탔다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힘주어 말하는 신부님과,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댓글들도 많이 뒤를 따랐다. 그에 반해 어떤 영상에선 경기도 어떤 학교에서 이 전례 없는, 한국.. 더보기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2399일⟩ 여기, 매번 머리를 부여잡으며 연신 "어렵다, 어렵다"라고 외치는 한 할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뒷걸음질 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다시 자신의 어려움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한 할아버지가 있다. 참 멋진 할아버지다. '멋진' 할아버지 👴🏻모두들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그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님이 이 할아버지라는 걸. 모두가 우러러보는 창작자의 대선배 같은 분, 가수 요네즈 켄시가 자신의 '북극성'이라 부르는 분.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까진 그가 그저 천재적인, 타고난 재능으로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세상을 그대로 뽑아내 현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특기'인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장장 7년에 가까.. 더보기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이 책의 서말에서 프로듀서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단편소설 에서의 '유지'와 같은 선택을 하는 인간들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고. 9개의 단편이 얽히고설켜 결국 다 죽으며 끝나는 소설. 인간들은 역시나 덧없이 사라지고 고양이만 살아남았다죠.   🔴🟠🟡 꼭 다 죽거나 죽였어야 했나요? 🍮 🔪일단 책 자체는 참 감각적이었다. 서늘하고, 갑작스럽고, 우연의, 필연의, 찐득거리고 번뜩거리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잘은 모르겠다. 엔딩 부분이 말이다. 생각해보라. 그 많은 사람들이 두 시간만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제목 그대로 '대학살'인 것이다. 그리고 대량실종이 발생한 이곳 뉴서울파크에는 온 부지를 뒤덮는.. 더보기
『홍학의 자리』 결국 홍학의 자리는 없었던 거다.   🦩   이 책을 검색하면 스포금지라는 단어가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런 고로 이번 감상문은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써보련다.   추리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것이다. 분명 내가 읽은 대목일텐데, 우지끈하며 부서지는 지면에 흔들리고, 막상 마주한 순간 이럴 리가 없다며 몇 번이고 앞으로 돌아가 뒤적거리게 된다는 것. 내 편견이 박살나자, 어이없는 심정으로 내 주장을 뒷받침해 주던 바로 그 문장으로 돌아가 보면, 막상 그 문장은 정확히 내 뜻대로, 내 기억대로 적혀져 있지 않다. 아니, 이게?! 외치게 되는 억하심정. 눈앞의 현실에 책을 부여잡은 채, 한쪽 입꼬리만 파르르- 떨리며 쓰윽 올라간다. 심장인지 마음인지 모를 것이 붕 떠있다. 아아, 이런 책을 마지.. 더보기
매 순간순간-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라는 말은 좋은 말이에요. 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에겐 이렇게 잘만 말하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이렇게 자주 말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왜요? 타인이 자기 인생을 사는 것과 자신이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 그것이 갖는 무게 자체가 다르거든요. 성공도 내게서, 실패도 내게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남들에게서 받는 시선의 길이도, 온도도 전부 내 책임인 것만 같아요. 으음, 알아요, 오은영 박사님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몫, 그 사람의 과제'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후련하게 '선택의 자유'를 얻게 되진 못하나봐요. 내 삶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벽에 걸려, 오고가며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감상, 내지 평가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면, 딱딱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