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여자의 귀 안쪽을 때리는 진동이 일었다. 왼편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활엽수 때문에 건너편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멀리서 무거운 울림이 하나둘 착실히 건너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p. 7)
이 책의 첫 페이지입니다. 가슴이 두고두고 벅차오르는 초능력 SF 순애 서사의 출발선이죠.
누구도 건드리려 하지 않는,
거대한 공동묘지 🪦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하나가 오늘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웹소설 제목도 아니고. 그런데 그 일이 정말 일어났다. 깔끔하게 절취선을 따라 잘린 듯 폭삭,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몇십 초 동안 그 위의 모든 게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다가듯 떨어졌다고. 물리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중력가속도를 9.8, 반올림해서 10㎨라 해보면, 5m를 떨어지는 데 1초가 걸린다. 20m를 떨어지는 데 2초가 걸리고. 꼭 잡고 있던 누군가의 손을 놓치고, 정신을 잃고, 공황 상태에 빠지고, 세상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약 30초를 가정해 보면 그들은 4500m를 떨어진 셈이 된다. 지각 아래로 5km를 뚫고 낙하한 영혼들이 있다구요, 여기.
5km는 그냥 걷기에도 부담스럽게 먼 거리다. 만약 이 거리가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서게 된다면? 에베레스트 산이 8,849m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계속해서 더 살아가고 싶다면, 그 절반을 뛰어넘는 높이를 후들후들 떨며, 판자 부스러기들의 원형 계단을 꾸역꾸역 밟아 가며 위로,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치지 않으리라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와⋯.
"⋯ 초능력 생긴 괴짜가 나타났다고 굳이 찾아내 죽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윤서리가 말했다.
" 넌 건물 부수고 총알 멈추는 유령이 너랑 같은 땅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걸 가만 놔둘 수 있겠어?" 서형우가 말했다. "그것들은 살상 능력을 갖추고 땅에서 기어 나온 좀비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p. 132)
서형우는 그들의 생존을 향했던 의지를, 그 절박함을 묵살했다. 그의 핵심 논리는 단 하나였다. '내가 이 괴물들을 세상으로부터 감추는 단 하나의 제어 장치라는' 것. 생각해 봐. 너희가 스스로를 당당히 드러내고 공존을 요청한다고? 그런 헛소리는 개나 주라 그래. 너희들은 비싼 값으로 세계 이곳저곳에서 매수, 납치, 내지 파괴하려 드는 살상 무기밖에 더 안 될 걸?
그런 세상이 되는 걸 내가 두 눈 뜨고 놔둘 것 같아?
누가 옳았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해보자. 과연 답을 알 수 있는 질문이었을까?
경선산성의 사람들은 이경선의 의지를 이어받았다. 정여준의 말대로, '불가능과 비상식'을 붙잡고 살아남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 책이 평범한 소년만화였다면 그들이 진정한 주인공들이었을 것이다. 비원은 세속적이고, 현실에 찌든, 그들의 사상만을 정의라 믿는 악의 집단이었겠지. 하지만 만약, 경선산성이 지지하는 희망이 가망 없는 허구의 것이었다면?
서형우의 말이, 최주상의 확신이 전혀 근거없다고 할 순 없다.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따뜻할 때도, 잔혹할 때도 있다. 우리의 이해 가능 영역을 뛰어넘는, 이 새로 나타난 신인류에 대해 세상은 어떤 표정을 지어줄 것인가?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공개한 것을 후회하는 날이 오진 않을까? 유한하고 단정적인 일회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선,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처절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옴짝달싹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 세팅이, 대립 관계가, 읽는 내내 숨을 턱 막히게 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그래그래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고 끄덕거리게 하고, 이거 완전 벗어날 구멍이 없을 것 같은데-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게 하는 것이었다. 작가님은, 천재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설정이 첨가되어 있었으니!
그렇다. 신가영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복원자다.
🤫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사람도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데, 시간을 돌리는 복원자가 그 희망을 놓아서야 되겠어? 잘못하면 다시 시도하면 되잖아.
더 나은 방법을 찾아 길을 돌아가면 된다고.
(p. 258)
순애, 순애, 그저 순애. 💓
세상은 힘 있는 자의 어깨에 무게를 지운다 했던가. 이곳, 이 상황에서, 세상은 윤서리를 지명했다. 네가 원하는 쪽의 갈래길로 온세상을 힘껏 잡아당기고 싶다면, 맘껏 발버둥쳐 보라고.
시간을 되풀이하면서 그녀는 때때로 절박함을 잊을 정도로 지쳐서, 숨기기 어려울 만큼 굳은 얼굴로 있기 일쑤였다.
(p. 331)
엉엉⋯. 우리의 여주인공은 단단하고, 아집있고, 피폐해질 정도로 깡따구 있는 존재였다. 자신은 몇 번이고 고생해도 좋으니, 이게 자기만족이라면 만족이고, 자기희생이면 희생일 시간 루프를 반복해가며, 싱크홀에서 처음 나왔을 때처럼,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딱 두고 보라고, 내가 포기하는 일은 없다고 지면에 나오는 대사 모두를 통해 떵떵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다정하게, 잔잔하게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할 말은 많지만, 마지막 숨을 다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라는 말 한 마디만을 수백 번이고 반복해서 내뱉는 남주인공과의 조합이라니⋯. 나, 이 조합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어.
🥹
생각해보면, 비단 정여준과 윤서리의 관계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모든 관계가, 결국은 순애였다.
네가 뭘 했든 앞으로 뭘 하든 난 괜찮아. 너야말로 날 용서하려고 노력하지 말렴. 용서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용서하지 마.
(p. 322)
신가영을 향한 최주상의 광적이면서도 한없이 절대적인 부성애.
그날 미처 함께 올라오지 못한 누군가가 나중에 더 올라올 수 있으니까.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p. 318)
자신과 함께 올라온,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사람들, 가능성들, 희망들을 향한 올곧은 사랑.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각자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할 수 없어서, 목숨을 걸어가면서라도 끝까지 사수했기 때문에 이 모든 갈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거 아닌가 싶어.
그리고 마지막, 우리의 피날레.
내가 아직도 만나지 못한 미래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p. 339)
'시간을 달리는' 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윤서리와 정여준의 사랑. 점점 가속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정답을 향해 수렴해 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냥 매 회귀마다 '새로운 너'를 죽이는 죽음의 연주만 무한정 반복하고 있기만 한 건 아닐지. 그리고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묵묵하게 지지해주고 있는 시간 밖의 연인.
왜겠어요? 순애니까 그렇죠.
- 저자
- 문목하
- 출판
- 아작
- 출판일
-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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