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에서 나만의 깊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작가들이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자신에게 되뇌는 것과 비슷한 자기세뇌다. 그리고 난 이런 자신감이 근거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간의 주목을 한눈에 받는다는 건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감상은 다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에. 당장 소설을 다 읽고 유튜브에만 가봐도 그렇다. 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폭력성'을 무려 4개의 층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전달한 한 인문학도도 있었고, 이 책이 등장한 선정적인 문구들을 큰 자막에 띄워가며 읊으신 후 이런 책이 노벨상을 탔다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힘주어 말하는 신부님과,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댓글들도 많이 뒤를 따랐다. 그에 반해 어떤 영상에선 경기도 어떤 학교에서 이 전례 없는, 한국인 최초, 아시아인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 『채식주의자』를 청소년 유해도서로 지정했다는 건에 대해 날카롭게 공격하는 청문회 자리도 있었다. 이 영상 역시 댓글들이 공격적이고 뜨거웠다.
한강 작가가 서말에 "세간의 관심도 오해도 뜨겁고 날카롭"다고 언급할 만했다. 나 또한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방황했고,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의문과 기이함, 거기서 비롯되는 거부감이 상당량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다양한 의견들, 천차만별의 온도를 띤 목소리들을 한꺼번에 접하고 나니, 딱히, "이런 건 아무래도 좋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감상, 나의 의견은 지극히 개인적일 뿐, 어떤 사회적 사명감을 띤 채 '올바르거나 타당하다'고 여겨질 단정할 목소리만을 내야 할 필요도 없다. 한강 교수님이 그러셨듯, 모든 건 "읽는 사람의 마음대로"니까.
'불편하다'는 느낌의 기저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이 책에 음란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주변인들이 불편해하던데— 하고 염려를 보내왔다. 물론 그 점도 눈썹을 찌푸리며 읽어야 했던 부분임은 맞았지만, 내게 있어서 더 큰 불편함의 요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영혜가 너무, 속된 말로, '병신같았다'는 것이다. 내게 그렇게만 느껴지는 영혜라는 캐릭터와, 그래도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일지언데, 어떻게 이렇게 저렴한 인상밖에 받지 못하는 나, 둘 다 불편했다.
이 책의 주제는 이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 선의를 가장한 채 퍼부어지는 온갖 시선들, 몰이해, 자기 뜻대로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폭력성". 그래, 책을 덮고 나서는 이 주제와 책의 지면을 연결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 영혜의 목소리는 단 한번도 '제대로' 나온 적이 없다. 자신의 꿈에 대한 느낌을 이탤릭체로 서술할 때만 한두 문단에서 이어질 뿐, 우리는 철저히 세 명의 화자의 시선과 서술을 통해서만 이 영혜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그들이 갖고 있는 편견,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그들만의 선긋기,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생각을 알게 모르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타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너가 어떻게 그렇게⋯⋯ 어? 진짜⋯⋯ 머저리 같은 존재, 씨." "순간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너가 문제지!! 라고 가슴을 답답해했다고. 나는 그 반응이 과장된 것인 것마냥 느껴졌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충분히 남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나? 나같아도 아내가 갑자기 저런다면 못 버틸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가 그어진다는 것
타일러는 영혜의 남편을 '역지사지가 안 되는 인간'이라며 비난했다. 물론, 세간에도 채식주의자들은 많을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 생각으로, 알레르기니 아토피니 하는 체질을 바꾸려고, 혹은 환경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된다.(p.23)"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꿈을 하나 꿨다고 해서, 하룻밤만에 고기를 배척하는 사람으로 180도 뒤바뀌진 않는다. 이미 이 한 문장에서부터, 남편이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나 개념의 범주에서 누락된 것이다, 영혜는.
경험해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업다. 이유를 물어도 어떤 꿈 때문만이라고 한다.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밖엔.(p.42)" 이상 그가 들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설명이었다. 물론, 이 꿈을 어떤 하나의 물꼬로 삼아 그 아래에 대체 어떤 유년기의 무의식적 트라우마가 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그녀가 삶을 살아오면서 내면화해야 했던 어떤 수많은 폭력들이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것인지, 바로 이 책의 주제를 향해 아내와 마주 보고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듯이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어떤 다정한 남편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치 타일러처럼. 하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닌가 보다,라고 이 텍스트를 읽으며, 나중에 타일러의 짧은 클립을 보며,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우울했다.
비단 타일러 뿐만 아니라, 남편이 몰인정하고 매정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이해해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 바로 그 점이 문제라고. 하지만,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유인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하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있지 않나? 물론 그 자유엔 책임도 필연적으로 따를 것이고. 결국 이 소설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동생, 딸, 아내, 처제를 자신의 개념, 자신의 이해 한도 안에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의 끝까지 영혜라는 인물을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입장에 처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런 세태의 극단점을 보여줬을 뿐이다. 아마 당장 내 삶에 적응해 보아도, 당연히 그런 차단적인 차가움이, 자기중심적 독자성이, 그 어떤 옹고집스러움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폭력성에서 온전히 벗어나고 싶어 고기도 거부하고, 종지에 차라리 나무가 되겠다는 영혜와, 그녀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폭력에 대한 안타까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겠는 나 자신과, 오히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는 피곤한 눈빛의 주변인들이 더 이해되고 공감되는 나 자신에 의해서 찾아왔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이제서야 그 불편함의 정체를 밝혀낸 것 같다. 속이 시원하다.
그럼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항상 이 고민을 하는 편이다.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면서도 평소 생활 스타일을 보면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라, 꼭 한 문장, 아니, 굳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인상이나 깨달음만이라도, 적어도 나의 호불호에 대한 한 방울의 적립만이라도 얻어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눈쌀이 절로 찌푸려지는 장면 여럿을 지나, 불쾌함 — 아마 일상에 내재한 폭력성을 극도로 끌어올려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었기에— 을 제대로 마주해낸 후, 하룻밤을 푹 자고 일어나서,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 타자기를 잡았다.
내 (조금 정리된) 생각은 이렇다. 우리 모두에게는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를 이해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영혜도 일차원적으로만 봐서는 이 모든 폭력의 피해자인 것처럼 보일 순 있다. 하지만 곧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소설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봄을 통해 알 수 있다. 끝끝내 그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폭력의 정반대, 절대선으로 여겨지는 나무들 역시 소설의 시작과 끝에 각각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p.19)",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p.268)"와 같이 서술되며, 결국 충분히 잠재적으로 누군가를 해치거나 파괴적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나무들을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p.210)"라고 말하며 절대선으로 인식하는 영혜 역시 자신만의 프레임 안에서 타인, 여기서는 '타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내지 관념 속에 타인을 집어넣는 것을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는 폭력의 가해자라는 타이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혜의 남편과 형부는 말할 것도 업고, 인혜 또한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 저런 애를.(p.176)"이라 말하며 영혜를 엄연한 정신병자의 타이틀 안에 두었으며, 그녀의 재기가능성을 일축했다.
희망적이거나 벅차오르는 소설들은 많이 있다. 나 또한 많이 읽었고, 그래서인지 그런 소설들의 감각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 소설의 가장 아래, 가장 벌거숭이인 잔혹한 인간성을 향해 뚝 하고 낙하해 버린 느낌이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없는 영역이 분리되며, 그 본질적 현상으로부터 수많은 몰이해가, 더 나아가선 폭력의 시선들이 파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조금 비관적일 순 있다. 하지만 한강 작가가 좋아하는 말대로, 어떤 상황에서든 한번 희망적인 면을 찾아보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앞으로는 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 이건 이해할 수 없겠는데.' 하고 선을 긋게 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나는 그때 돌이켜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을. 그리고 항상이라곤 말 못하겠지만, 가끔씩, 이해할 수 없다고 선 그어버린 사람을 웃으며 이해할 수도,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은 '당연히,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 발자국 더 나서서 그 사람을 포용한 것'이 되겠지.
영혜처럼 정말로 나무가 될 순 없다. 나무가 되겠다고 몸부림치며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일부러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일부러 그 사람을 향한 한정적인 편견의 틀을 의도적으로 허물어버리는, 그런 나무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이 책이 불러올 수 있는 가장 큰 긍정적 파급력 아닐까?
- 저자
- 한강
- 출판
- 창비
- 출판일
- 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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