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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
 
  바보. 멍청이.
 
  자아, 부연을 해보자.
 
  항상 생각하곤 해. 저렇게 운명적이고도 끈끈하지만 순수하게 오래되어 그 사람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러한 대상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내 옆의 안경쟁이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딴 건 존재하지 않아. 그건 망상,이야."
 
  힝, 하지만 그건 좀. 일단 이 책에서의 ⚪️와 ⚫️는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순정만화의 클리셰에는 소꿉친구가 꼭이니까. 그 이후로 쭉, 그냥 그대로 쭉. 그들은 몇 번의 멀어져다 가까워짐을 반복하며 같은 삶을 살아간다. 두 명의 독립적인 삶이 반복적으로 접하는 느낌이라기보단, 하나의 삶이 두 개의 실선으로 구성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그렇게 하나의 궤적을 만들어가는 느낌. 결국 두 개가 아니라 한 개라는 거잖아.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이렇게 서로에게 너무 강하게 얽힌 삶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책에서 ⚫️가 말했다. 나는 그른 것 같으니 ⚪️ 너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라고. 헤어지자고. 하지만 ⚪️은 ⚫️ 곁에 끝까지 남는다. 그렇게 둘은 함께 산 속의 청솔모가 되었다가, ⚫️는 시체가 되었고, 이내 ⚪️ 뱃속의 몇 달 치 영양분이 된다. 이런 바보같은 관계가 어딨어.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너를 지니고 살아가겠다는 ⚪️의 말. 참 참신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영양분은 그 다음날이 되면 화장실의 이슬로 사라졌을 거라는 말을 하면 사이코겠지?


 
  처음 이 책을 작가의 말 끝까지 읽고 나서의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아니 그래도 너무 서사가 충격과 절망 뒤 절망 뒤 충격, 그리고 끝인데⋯ 그 둘의 미친 사랑 이야기는 잘 들었지만, 이해는 하지 못했어요. 나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강한 집착과 애착을 동시에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대상을 눈앞에서 잃어본 적도 없으니까. 응, 솔직히 말하면 미경험자의 공감대 형성 실패! 라고 간단히 땅땅땅- 진단을 내릴 수도. 
 
  하지만 며칠 잊고 살다가 왠지 기록으로 남기고파 다시 책을 스르륵 훑어 보며 느낀 점은, 시체를 먹는다는 고어한 소재에 가려졌지만 참 설레는 말들이 많았다는 거다. 타인에게 그렇게 솔직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에 대한 고백을 삶 통째로 받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일 거야. 그럼에도 그들의 삶이 불행했던 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탓이긴 하지만. '환경' 이야기를 꺼내니, 어쩌면 이 결말이 ⚪️과 ⚫️가 서로를 너무 사랑한 탓도 있겠지만 멍청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실험장의 쥐처럼,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 어린 시절부터 서로가 서로의 전부가 된 나머지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한 거야. 그래서 무너지는 하늘 천장 속 솟아날 구멍을 찾지 못한 채 그냥 둘 다 그 아래 깔려버리고 만 거야.
 
  나 나름 이 책을 이해하려고 가설을 세워 본 거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를 버렸을 거야. 일시적으로. 대신 대학에 가고, 정육점 말고 더 좋은 곳에 취업을 해서, 좀 더 생산적으로 돈을 벌 궁리를 한 끝에, 내 돈으로 ⚫️를 그의 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나는 그들의 삶을,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한 걸 거다. 낭만 실격! 이해력 부족! 아마 의지할 다른 누군가는 일절 없는 채로, 정말 서로만 서로를 기억해줄 수 있다는 말의 무게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걸 거야.
 
  그렇다면, 그 둘은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참 다행이었겠다. 아마 ⚪️은 오래오래 살 거야. ⚫️가 살았음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는 오래오래 ⚪️을 기다려 줄 거야. 결말에 ⚫️가 한 말처럼, 그는 이미 죽었으니 천만년 만만년이고 기다렸다가 ⚪️이 오는 날 손에 손 잡고 사이좋게 같이 환생해야지. 그렇게라도 행복해라. 같이 손잡고 다음 생에 진입해도 부디 그때는 삶이 그들에게 좀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구와 담, 이름이 둘 다 참 담백하고 입에 착 붙는 이름이라 좋았다. 그 둘의 마음이 짧은 생애 내내 항상 변함없이 서로를 소중히 여겨 좋았다.
 
  그렇게 잔잔하고 영원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나에게 알려주는 것 같아 웃었다.

 

 
구의 증명
사랑 후 남겨진 것들에 관한 숭고할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 최진영 소설 《구의 증명》은 사랑하는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겪게 되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 혹은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최진영은 퇴색하지 않는 사랑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아름다운 문장과 감성적이며 애절한 감수성을 통해 젊고 아름다운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냉정한 죽음에 대해 세련된 감성과 탁월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저자
최진영
출판
은행나무
출판일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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