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건 다 비슷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문화와 생활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나쁜 짓> 단편 속 건휘의 말이다. 이런 담담한 말투로 내뱉는 말 앞에는, 파랗게 조용히 가라앉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에서의 야경이 조화롭게 이 단편에 녹아들어 있다.
아름답고 쓸쓸하다.
우리는 이따금씩,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으로, 그전까지 전혀 고려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삶에 급류와도 같은 낙하의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종종, 그런다. 왜냐하면 세상은 넓고 사람 사는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삶을 살아가는 자세들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두고 말할 것 같으면 그 장점도 단점도 가장 많이 아는 자는 당연히 나다. 매일 눈앞에 두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 방식을 고수할지 말지를 매 순간 무의식적으로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는 원초적인 책무를 떠안고 있다.
"우리도 그냥 여기서 살까?"
그냥 한번 해 본 소리라는 걸 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 그래도 내 집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여행은 끝내 추억으로 남을 테지만 이곳에서의 삶을 상상해 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p.153
왜 내가? 때때로 반항심이 들곤 했지만 잠깐이었다. 막연한 두려움. 밑도 끝도 없는 기분이었다. 그런 것이 내 안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p.152
샛노랗게 번져 타오르는 국회의사당의 야경을 보며, 건휘는 아름다운 동시에 쓸쓸하다고 느꼈다.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저 무언가는 동시에 나의 현실이 되어줄 수는 없기에 쓸쓸하다. 모순적인가? 아마 아닐 거라고 본다. 이는 단지, 그래, 여행자의 객수일 뿐이다. 여행의 형태를 띠고 우리가 현실로부터 슬그머니 벗어나는 일시적인 일탈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또 서비스로 현재 삶의 걱정과 고민들을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처럼 작게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효과까지 가졌기에,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모두들 다 비슷한 저 각각의 이유로 달콤쌉싸름하게 현대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누군가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면서.
다시금,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나의 요즘 제일의 관심사, 바로 '잠재력 상태의 미학'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나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폭포 위의 물은 떨어지기 직전의 높이를 유지할 때가 가장 위치에너지가 높다. 내 지갑 안에 있는 돈으로 무슨 운동이든지 일으킬 수 있는 힘이 고스란히 내장되어 잠자고 있는 상태. 나는 이 ‘사전’ 상태가 심히 마음에 든다. 생각해 보자. 영화를 보기 전의 설렘, 마음에 드는 반지를 사기 전, 어차피 사고 말 것을 앎에도 조금만 더 둘러보고 올게요'하는 심리, 최애 라면을 사서 찬장에 넣어둔 다음 언제든지 먹을 수 있어-하는 준비된 상태의 든든함, 토플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난 후 "휴, 이제 언제든 교환학생 신청서를 넣을 수 있어"하는 안도감, 동시에 느껴지는 교환학생에 대한 무한한 긴장감과 기대감. 뭐, 이런 것들이다. 이런 말랑말랑 손에 잡힐락 말락 하는 삶 속의 갖갖 '잠재된 상태의 미학'이 나를 매료시켜 버린 것은 감히 불가항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A와 ~A로 구분해야 하겠소.
하지만 물론 이게 그다지 늘 건강한 마음가짐만은 아니어서, 이런 항변이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인용하겠다. "이보시오, 작가 양반. 그렇다면 작가 양반은 해당 미학에 따라 교환학생 준비 과정으로써의 토플 시험은 봐뒀지만 끝끝내 교환 신청은 미루고 미루다가 그 사이의 긴장감만 즐기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건 결국 아무런 가치 있는 결과를 불러오지 못하오." 안다. 나도 알고 있다. 실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나는 무언가를 미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남들에 비해 크게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최근에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2~3일에 한 번씩 있는 상황 보고용 비대면 줌회의를 끝낸 뒤면 마치 사형 선고일이 그 뒤로 3일가량 연기된 것처럼 하아아아, 하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오늘 자정까지 닥쳐서 해야 하는 일이 갑자기, 외부 사정에 의해 OR 내 자기 합리화로 인해 내일까지로 미뤄진 경우, 나는 아주 행복하게 심장을 편히 두근거리며 잠에 들거나 그 황금 같은 시간에 딴짓을 했다. 하루살이의 표본이었고, 내 삶을 '준비해 가꿔 나간다'는 인식은 황량하게 나뒹굴던 마구살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피적 미루기 성향 덕에 조금 더 많은 것을 해치울 수 있긴 했었다. 가학적인 생산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마감일이 정해진 일은 당장 내 앞에 닥쳐오기 전까진 외면하고, 그 시간엔 내가 스스로 하고 정하고 싶어 별도로 만든 '할 일' 리스트에 준거하여 영어 감각을 두드려 깨운답시고 영화를 본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농구를 간다거나 하다 보니, 돌이켜 봤을 때 내 3학년 1학기는 생각보다 학업 이외의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긴 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형태의 '전념'은 결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성적 평점도 결국 3.2으로 끝나고 만 것이겠지. 물론 이것저것 많이 했다는 사실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목표 지점을 겨냥하여 하루하루를 한 걸음씩 발판 삼아 최단직선거리로 다가간다'는 정말 청춘 같고 꿈같고 성장일기 같은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법칙을 세웠다. 나의 미학을 발전시켰다고나 할까, 2장 1절을 선언해 첨부했다고나 할까.
꿈을 향한 것에는 잠재된 상태의 정체가 독이 되고,
소비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는 잠재된 상태의 정체를 최대한 즐기는 것이 맞다.
내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철학은 당연히도 유연하고 다목적적인 미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내가 바라는 '잠재력'의 미학의 과녁을 선명하게 직시한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고로,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나의 통계학 수업 녹강을 듣고, 과제를 하고, 제출을 할 것이다. 아아, 나는 과제를 제출할 때 온 세상에서 폭죽마냥 내게 터트려 쏟아주던 랜덤한 이모티콘들을 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벅차오르더라. 이건 또 역시 내가 '소비'가 아닌 '학업'을 대상으로 하는 미학의 한 알맹이일 것이다.
- 저자
- 박서련, 김현, 이종산, 김보라, 이울, 정유한
- 출판
- 돌베개
- 출판일
- 202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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